영화 <오펜하이머> 정보
제목: Oppenheimer, 2023
개봉: 2023.08.15
장르: 스릴러/드라마
국가: 미국, 영국
등급: 15세 이상관람가
러닝타임: 180분
평점: 7.9
줄거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하는 천재 과학자의 핵개발 프로젝트.
영화 <오펜하이머> 출연진
출연진: 크리스토퍼 놀런 Christopher Nolan(감독), 킬리언 머피 Cillian Murphy(J.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 에밀리 블런트 Emily Blunt(키티 오펜하이머 역), 맷 데이먼 Matt Damon(레슬리 그로브스 역),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Robert Downey Jr.(루이스 스트라우스 역), 플로렌스 퓨 Florence Pugh(진 태틀록 역), 조시 하트넷 Josh Hartnett(어니스트 로렌스 역)
영화 <오펜하이머> 예고편
영화 <오펜하이머> 리뷰, 후기, 감상평
<오펜하이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놀라운 영화였습니다. 대폭발의 스펙터클 없이 3시간이나 지속되는 한 인물의 전기 영화임 임에도 마치 멈추지 않는 폭풍처럼 시종일관 휘몰아치거든요. 항간에 알려지기로는 과학적인 영화,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 같은 영화라고들 합니다만 아닙니다.
<오펜하이머>는 가공할 전능의 힘을 타인의 손에 쥐어준 인간적으로는 한없이 욕망적이고 오만했던 한 과학자가 내면적으로 느낀 동요와 후회, 그의 정치적 침몰에 집중하는 강하고 빠른 파멸의 연쇄 반응 같은 영화로 진짜로 분열되고 융합되는 건 핵이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내면입니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물리학 대학원생 시절부터 유럽, 캘리포니아 버클리, 로스 알라모스 시절을 탐구합니다, 이것과 다른 얼개로 두 개의 청문회가 나와요. 하나는 오피의 보안 허가 유무를 결정하는 사실상 그의 공직생활을 끝장낼 비공식 청문회이고, 또 하나는 1958년 스트로스 제독의 상무장관 지명청문회입니다. 이 영화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한때 과학자들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오만하면서도 순수한 오펜하이머를 거울처럼 배치해 당시 미국의 상류층, 고위층 인사들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도 드러내는데요. 그 상징이 원자폭탄인 거죠.
맨해튼 프로젝트를 둘러싼 사람들은 자신을 애국자로 믿고 과학과 지식을 선함의 도구로 여깁니다. 이 신앙심과 믿음의 헛됨을 볼 수 있었네요. 대부분의 장면은 일대일 대화 장면이고 대사와 음악은 시종일관 끊임없이 나오며 대사의 텀도 별로 없고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의 순간순간을 병렬적 구성으로 넘나들며 다양한 과학 정치 유명인사들이 단 몇 초에 텀도 없이 대사를 쏟아내고 그 모든 사람을 70mm 아이맥스로 클로즈업합니다.
플롯이 복잡하지만 지나치게 어렵거나 불친절하지 않고 특별한 지식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영화가 무척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생각의 방향만 유지해도 영화의 빠른 흐름에 올라탈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몇 가지 특징이 있죠. 흑백 시퀀스가 전체 분량의 3분의 1에 달합니다. 언뜻 보면 스트로스의 장관 지명 청문회를 중심으로 흑백 시퀀스인 것 같지만 실은 로다주가 연기하는 루이스 스트로스의 관점인 장면이 흑백, 오펜하이머의 관점이 컬러입니다. 과거나 현재를 나누는 용도가 아닌 것이죠.
놀란 감독은 아이맥스가 주는 스펙터클이라는 게 오직 고 예산 액션 블록버스터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킬리안 머피의 표정을 화면 가득 채워 복잡 미묘해진 감정을 보여주는 내면의 스펙터클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유리하다는 걸 증명합니다. 한 인물이 후회하고 고뇌하는 감정을 정밀하게 기술과 연결한 것이죠. 그리고 역시나 놀란 감독 영화답게 시간 배열을 특징으로 들 수 있겠는데요.
비공식 청문회를 비롯한 오펜하이머의 모든 생애로 여러 지점을 계속 오갑니다만 연속적이지 않고 점진적이지도 않으며 유기적입니다. 계속 시점을 바꿔도 병렬 구조로 같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요. 청문회를 현재로 보면 트리니티 실험 과정과 연구자로서의 여정이 과거이고 트리니티 실험을 현재로 보면 청문회가 미래가 되는 그 배열과 병치가 너무 훌륭합니다. 전작인 <테넷>은 편집 감독 제니퍼 레임이 아니었으면 나올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펜하이머>도 그렇습니다.
<음악>
루디윅 고란손은 <오펜하이머>에서 완전히 새로운 앰비언트 음악을 들려줍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특별히 어떤 선율이 머릿속에 남지 않아요. 선율감을 모호하게 작업해서 쉼 없이 음악이 흘러나와도 음악이 절대 앞서 가지 않고 영화와 한 몸이 되어 폭발 실험 현장의 연기처럼 뭉게뭉게 영화를 채워나갈 뿐이죠. OST에서 최고의 트랙은 '캔 유어 더 뮤직', '트리니티'입니다. 이 음악들이 정교한 편집과 뒤섞이는 느낌은 압권이었네요.
<연기>
킬리언 머피의 연기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입니다. 감정을 그때그때 말로 풀어내지 않고 최대한 농축해서 은유적으로 몇 마디 던지거나 표정으로 드러냅니다. 오펜하이머는 실제로도 많은 감정을 갖고 있지만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는데요, 그 점을 너무 훌륭하게 연기합니다.
레슬리 그로브스 준장을 연기한 맷 데이먼은 간혹 유머러스한 순간을 보여줬고 굴곡진 삶을 살았던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를 연기한 에밀리 블런트도, 졸렬하고 야욕적인 스트로스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오펜하이머의 동료인 어니스트 로렌스를 연기한 조쉬 하트넷도, 잠깐 나왔을 뿐이지만 이 작품 최고의 신스틸러인 아인슈타인 역 톰 콘티도 너무나도 훌륭했습니다.
비판을 받기도 했던 지점이지만 수십만 명을 죽게 한 폭격 장면을 이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놀란 감독은 이걸 두고 최대한 오페라이머의 관점에서 보류했고, 오펜하이머 역시 라디오로 공습소식을 들었을 뿐이었기에 그렇게 표현했다고 말했죠. 이 모든 생략과 은유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오펜하이머가 손에 피가 묻은 느낌이라고 말하거나 섬광 속에서 피부가 박리되는 사람들을 오펜하이머가 상상하는 것처럼 밖에서가 아닌 내면 속에서 핵폭발이 일어나는듯한 감정 묘사도 전부 이 영화의 태도입니다.
영화 속에서 로마니치가 블랙홀 연구 발표가 된 걸 보고 오펜하이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1939년 9월 1일 세계는 이날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있던 날이라 다른 의미로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죠.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연설에서 오펜하이머는 똑같은 말을 합니다. 연구로 기억될 줄 알았는데 원폭투하로 기억되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만 이제부터 어쩌면 오펜하이머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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