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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는 상처받은 한 여성의 통쾌한 복수를 그리고 있지만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건 문동은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인데요. 특히 드라마에서 여러 번 강조되는 건 신, 부모 그리고 돈에 관련된 계급입니다. 동은의 복수를 이야기하면서 드라마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다양한 층위를 한번 말해보려고 합니다.
문동은의 인생은 기구합니다. 애초에 축복받지 못한 아이였던 그녀는 학폭을 당하기 전부터 인성이 밑바닥인 엄마에게 고통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 연진, 박연진은 그녀를 괴롭히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동은을 학교에서 나가게 만든 다음 엄마까지 그녀를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학폭 이후 동은의 주변엔 아무도 남지 않았죠.
사실 문동은이 학폭을 당한 이유는 결국 그녀의 계급 때문입니다. 반대로 박연진이 이토록 끔찍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것도 결국엔 돈이 모든 것을 막아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연진은 돈의 힘으로 동은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앗아가 버립니다. 학폭만 당하지 받았으면 건축학도로서 악착까지 미래를 꿈꿨을 동은이었겠지만 학교폭력을 당한 이후 평생을 과거에 사로잡힌 복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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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몸에 새겨진 고데기의 찢어진 상처 그리고 트라우마들은 지속적으로 문동은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동은은 자신이 겪었던 지옥 같은 인생을 그대로 연진에게 돌려주려 합니다. 남편과 딸이 연진에 질려 떠나게 만들었고 허울뿐인 친구들은 물론 마지막으로 그녀의 어머니마저 등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복수가 흥미로운 점은 동은은 연진의 미래 역시 빼앗아갔다는 점에 있는데요.
손명호는 결국 김경란에게 살해당합니다. 하지만 손명오는 박연진이 죽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연진이 살해했던 윤소희의 죽음에 대한 죗값을 받아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니까요. 동은은 손명오 살해에서 김경란을 빼버리지만 그 진실은 끝끝내 알려주지 않습니다. 박연진의 미래를 빼앗아 버린 채 그녀의 남은 인생이 문동은으로 채워지길 원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문동은의 복수 방식은 악당이 악당을 벌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운이 매우 좋았습니다. 2004년의 악당들이 여전히 쓰레기 같은 인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요. 본드를 불던 이사라는 여전히 약에 취해 있고 체육 선생과 사귀고 있던 혜정은 남자를 통한 신분상승을 꿈꾸고 있으며 전재준과 손명오는 끔찍한 성폭행을 저지릅니다.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망각입니다. 윤소희, 문동은의 인생을 박살 내놓았으면서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쓰레기로 남아 있어서 동은의 복수는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들 사이에 조그마한 균열을 만들자마자 스스로 싸움을 벌이고 서로를 파멸로 이끌고 가죠. 다만 동은의 복수에는 분명 신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신은 주로 날씨로 시각화되어 보이는데요. 윤소희가 죽던 날 결정적인 증거로 남아있던 라이터는 눈이 내려 잘 보이지 않았고 손명오의 시체가 유기되지 않았던 이유도 당일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홍영애가 현남의 남편을 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기 때문인데요. 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싸움이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래서 <더 글로리>는 한국 사회에서 주류인 모든 종교가 등장합니다. 무당을 믿고 있는 박연진 일가, 아버지가 목사인 이사라, 그리고 절에 다니고 있는 혜정까지 등장하는데요. 재미있는 점은 신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무신론자가 된 동은이 사실상 모든 신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죠.
박연진 일가가 믿고 있는 무당은 굿판을 벌이다 갑자기 벌전을 받습니다. 사실 굿판 자체는 문동은의 세팅을 가능성이 큽니다. 전날 무당을 찾아온 동은이 소희가 빙의된 것처럼 연기해 달라고 협박했겠죠. 다만 무당이 벌전을 받고 부적이 홍영애의 얼굴에 떨어진 것은 천벌을 받았다고 보는 해석이 더욱 타당해 보입니다. 돈맛을 알고 신기가 떨어진 무당은 끝끝내 굿판에서까지 장난질을 벌이다 벌을 받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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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하게 십자가 밑에서 약을 하다 파멸을 맞은 이사라 역시 기독교의 신에게 천벌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대로 말하자면 신이 미리 경고한 선악과를 에덴의 뱀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먹은 죄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손명오는 뱀을 상징하는 문신이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동은은 주여정의 복수를 도와줄 사람을 절에서 만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신은 문동은의 복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죠.
이 드라마에서 신은 특정 종교의 신은 분명 아닙니다. 모든 곳의 신이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분들이 예측한 것처럼 부동산 할머니는 신의 현신으로 보입니다. 동은과 할머니가 만났을 때 동은이 할머니를 구한 게 아니라 반대로 할머니가 동은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복수가 시작되고 완성될 수 있게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이죠. <더 글로리>는 복수를 통해 구원받는 희생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주여정과 문동은의 로맨스가 지겹도록 나오는 것은 복수를 끝내고 난 이후 문동은의 삶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은은 복수를 끝마치자마자 주변을 정리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려 합니다. 박연진에게 미래를 빼앗겼던 그녀는 복수를 끝내자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이때 나타난 주여정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주여정은 복수의 모든 여정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서 새살이 돋게 만들어주고, 무엇보다 복수가 아닌 평범한 저녁의 행복을 만들어 줍니다. 그녀가 주여정을 도와 새로운 복수를 시작하는 것은 복수를 통해 겨우 미래가 생긴 그녀가 사랑에 빠진 여정도 구원하려 하는 것이죠. 한마디로 드라마를 정리하자면 "상처받은 자한테 복수심만큼 잘 드는 처방도 없어요.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라고 드라마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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